- 국내 여행기/서울(성북구)

정릉(貞陵), 그리고 동구마케팅고등학교 오르막길에 얽힌 추억

Lesley 2012. 4. 23. 00:15

 

  3월 중순에 찍은 사진을 이제야 올리게 되었다. ^^;;

  여러 사람 고생시킨 독한 감기를, 나도 3월말부터 2주일 정도 앓고나서 엄청나게 게을러졌기 때문이다.  3월의 어느 날, 볼일이 있어서 혜화동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왕 그 쪽으로 나가게 된 김에, 볼일 다 보고서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릉에 가봤다.

 

  정릉(貞陵)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이다.

  즉, 신덕왕후는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였다.  다만, 태조에게는 신덕왕후 말고도 신의왕후(神懿王后)라는 비도 있다.  태조가 아직 고려의 장수였던 시기에 두 명의 부인을 맞았는데, 신의왕후가 첫 번째였고 신덕왕후는 두 번째였다.  하지만 신의왕후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생전에 왕비가 되지는 못 했고 나중에 추존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사실상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정릉 가는 길이 좀 험난한 편이다.

  정릉으로 가려면, 먼저 전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동구마케팅고등학교(구 동구여상)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그리고 동구마케팅고등학교를 지나 좀 더 올라가 성북구민회관과 성북공원을 지나친 후, 다시 주택가 골목을 통과하면 정릉에 도착하게 된다.  정릉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아니면, 그런 주택가 안쪽에 왕릉이 있을거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정릉 가는 길에 문제가 하나 있으니, 동구마케팅고등학교 가는 오르막길이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정릉에 갔을 때가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3월 중순이었다.  그래서 겨울용 오리털파카를 입지 않고 봄용 야상점퍼를 입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추웠다.  그런데 그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15분 정도 걸어올라갔더니, 다리가 아픈 것은 둘째치고, 날씨에 비해 얇다고 느꼈던 야상점퍼조차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온몸에 후끈후끈 열이 올랐다. -.-;;  

 

  사실, 동구마케팅고등학교 올라가는 오르막길의 악명(!)은 중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중학생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요즘은 어떨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실업계 학교 원서를 써야 하는 시기가 되면, 실업계 학교 학생들이 자기가 졸업한 중학교에 가서 후배들 상대로 홍보활동 비슷한 것을 했다.

  그 때에는 동구마케팅고등학교가 아니라 동구여상(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이라고 했는데, 여자상업학교로는 서울에서 2위네 3위네 할 정도로 쟁쟁한 학교였다.  그런 동구여상으로 진학한 선배들도 모교에 찾아와서 '우리 동구여상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하며 열심히 홍보활동을 했다. (한창 먹어대는 나이의 후배들 상대로 한 홍보활동이라, '우리 학교 매점이랑 식당에서는 00도 팔고 XX도 팔고...' 하는 식의 먹거리 위주의 홍보활동이었음. ^^)  지금 생각해보면, 어지간하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추세가 이미 굳어지던 시기라서, 나름 유명하다고 하는 실업계 학교에서조차 위기감을 느끼고 홍보활동에 열을 올렸던 게 아닌가 싶다.  

 

  하여튼 그렇게 한바탕 홍보활동이 지나간 후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었을 때, 문제의 오르막길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동구여상의 오르막길이 워낙 악명 높다보니, 우리 후배들 사이에서는 '정말로 겨울철에는 밧줄 잡고 오르막길 올라가야 해요?' 라는 질문이 제일 먼저 나왔던 것이다.  그 때까지 동구여상의 장점만 열심히 이야기했던 선배들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사실이다.' 하고 실토를 했고... ^^;;

  나는 그 오르막길에 대해서 말로만 듣다가 이번에야 처음 봤는데, 과연 눈 펑펑 쏟아지거나 바닥이 빙판이 되는 날에는 밧줄 잡지 않으면 못 올라가게 생겼다. ㅠ.ㅠ 다행히 지금은 마을버스가 오르막길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혹시라도 한성대입구역에서 도보로 정릉까지 올라가실 분은 각오 단단히 하시기를...!

 

 

 

정릉 옆 주택가의 주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새둥지(?).

 

  정릉으로 통하는 막바지 코스인 주택가를 걷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대문 옆에 새둥지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 안에 무슨 식물이 있다.  도대체 저게 무엇일까?  다른 주택가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시는 분은 댓글로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정릉을 구경하자면...

 

 

 

신문(神門)에서 바라본 정자각(丁字閣) 및 신도(神道), 어도(御道)의 모습.

 

  신문, 정자각, 신도, 어도가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역시 같은 조선시대 왕릉인 '의릉' 에 대해 포스트 올리면서 설명을 했으니, 궁금하신 분은 그 포스트를 참조하시기를...  ☞ 의릉(懿陵) - 왕릉과 안기부의 기묘한 동거 (http://blog.daum.net/jha7791/15790831)

 

 

 

  사실 태조는 조강지처인 신의왕후보다는, 오늘 소개할 정릉에 묻혀있는 신덕왕후를 훨씬 총애했다.

  신의왕후는 태조네 집안이 그저 일개 호족이었던 어린 시절에(17살) 부모의 뜻에 의해 결혼한 부인이다.  그리고 혼인 생활 내내, 그 시절 요구되는 이상적인 아내 역할에 맞춰서 가사와 자녀양육에만 몰두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해 신덕왕후는 태조가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된 후, 그에 걸맞는 쟁쟁한 집안 출신과 연합하고자 하는 정략적인 의미에서 본인의 의지로 맞아들인 부인이다.  즉, 요즘 말로 하자면, 신덕왕후의 친정이 신의왕후의 친정보다 '훨씬 잘 나가는 집안' 이었다.  게다가 신덕왕후는 무척 총명하고 대담해서, 태조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신덕왕후는 태조보다 무려 21살이나 어렸다...!  옛 사람들이 10대에 혼인한 것을 생각하면, 부부지간이라기보다는 부녀지간이라고 하는게 나을 정도의 나이차다.  그렇게나 어린 부인이 머리까지 똑똑하고 친정도 든든해서 자신의 정치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 태조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어화둥둥 내 사랑아~~' 했을 것이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자녀 중 막내인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을 조선의 첫 번째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한다.

  남편의 절대적인 총애와 신임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보다 서열이 위인 신의왕후가 이미 세상을 떠서 자신이 중전 자리에 앉게 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 왕비의 지위가 가져다 준 권력과 명예, 찬란하게 빛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들의 미래 등 모든 것을 다 누리던 신덕왕후는 왕비가 된지 겨우 몇 년 만에 병사하게 된다.  세상을 뜰 때 41세였으니 아쉬움이 남는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낳은 2남 1녀의 비참한 운명을 안 보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겨우 10대인 어린 이복동생을 순순히 세자로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큰 공을 세웠고 나중에 제3대 왕 태종(太宗)이 되는 다섯째 왕자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의 불만과 분노가 대단했다.  결국 정안대군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의안대군과 그 형 무안대군(撫安大君)이 죽임을 당하고 경순공주(敬順公主)는 남편을 잃고 출가하게 된다. 

 

 

정자각 뒤로 보이는 봉분.  태조의 뜻과는 달리, 정릉에는 신덕왕후 홀로 묻혔음.

 

  신덕왕후와 태종의 악연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원래 정릉은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태조가 신덕왕후를 워낙 아꼈기 때문에, 도성 안에는 누구도 묘를 쓸 수 없다는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도성 안 정동에 능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힐 생각으로, 능을 조성할 때 2인용으로 넓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덕왕후를 너무나 싫어했던 태종은, 태조가 세상을 뜨자 따로 건원릉(健元陵)을 만들어 아버지의 시신을 그 곳에 묻고, 정릉을 원래 자리인 정동에서 지금의 성북동으로 이전해버렸다.  사실상 정릉을 도성 밖으로 내쫓은 셈인데(조선시대에는 성북동은 경기도였음.), 그냥 내쫓기만 한 게 아니라 일부러 파괴했다.  우선, 정릉의 봉분을 평평하게 깎아서 무덤 자리도 제대로 못 알아보게 했다.  그리고 마침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광통교 수리에 쓴다면서 정릉의 각종 석물을 들어내는 모욕을 주었다.

  그렇게 정릉을 파괴하던 날, 엄청난 비가 쏟아지며 하늘에서 여자(물론 이 여자는 신덕왕후)가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소문이기는 하지만, 그 시절 백성들의 눈에도 태종의 처사가 지나친 것으로 보여서 신덕왕후를 동정했기에 그런 소문이 났을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정릉의 모습.

 

  신덕왕후는 사후 약 300년이 흐른 제18대 왕 현종(顯宗) 때에야 왕비로 복위되었다.

  유림의 거두이며 조정 대신인 송시열(宋時烈)이 상소를 올려 신덕왕후의 복권을 주장해서 그리 되었다.  그러면서 파괴된 정릉도 다시 왕비의 능다운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그런데 정릉 내에 비치된 설명서를 보고 뜻밖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태조가 신덕왕후를 알게 된 사연에 관한 설화가 설명서에 써있었는데, 이 설화가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첫만남에 얽힌 설화와 거의 똑같다...!  즉, 조선 태조는 사냥을 하다가(고려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우연히 우물가에서 한 처녀를 만나(조선 태조는 신덕왕후, 고려 태조는 장화왕후) 물을 청했다.  그러자 그 처녀가 바가지에 담긴 물에 버드나무 잎을 몇 개 띄어 주더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묻자, 말을 달리느라 목이 마른 사람이 차가운 물을 갑자기 마시면 체할까봐 버드나무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마시라는 뜻으로 그리 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배려와 지혜에 감동한 두 태조가 각각 그 두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그러고보니 공교롭게도, 두 처녀 모두 두 태조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는 점 역시 같음. ^^)  조선 태조에게도 이런 설화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이 버드나무잎 설화는 한 왕조를 세운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따라다니는 설화인 모양이다. ^^

  대학시절, MT에 갔을 때 이 설화와 관련한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었다.  한 남학생이 저녁 지을 준비하던 여학생에게 물 좀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밥그릇에 생수를 따라서는 그 위에 커다란 깻잎(저녁에 고기 구워먹을 때 쓰려던 깻잎) 한 장을 동동 띄어 건네주는 것이다...!  덕분에 모두들 뒤집어져서 웃었다. ^^ 

 

 

겨우내 얼어붙었던 계곡물이 3월 중순에도 하나도 녹지 않고 그대로였음. 

 

  정릉  부지가 제법 넓고 얕으막한 산이어서 산책코스로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아무리 꽃샘추위가 기승이어도 그렇지, 그래도 한낮에는 영상 7, 8도까지 오르는 때였는데, 계곡물이 흐르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게 녹지 않고 있어서 좀 놀랐다.  저 얼어붙은 물 옆에 보이는 정자 비슷한 것은 약수터인데, 저렇게 물이 꽁꽁 얼어붙어서야 도무지 마실 수가 없다. ^^;;

  신덕왕후가 죽은 후에 태종에게 받은 모욕과 멸시, 그리고 신덕왕후의 자녀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생각해보면,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지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을 풀지 못해서, 그 한 때문에 물이 쉽게 녹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의릉(懿陵) - 왕릉과 안기부의 기묘한 동거 (http://blog.daum.net/jha7791/15790831)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왕릉보다 훨씬 큰 왕비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224)

헌인릉(獻仁陵) - 서울 외곽의 조선왕릉(http://blog.daum.net/jha7791/15791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