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개성(開城) - 박완서의 '꿈엔들 잊을 수 없는 은빛도시'

Lesley 2012. 4. 12. 00:02

 

  개성(開城)의 옛 이름 '송도(松都)' 와 '송악(松嶽)' 은 모두 소나무와 관련있는 지명이다.

 

 

  이런 지명은 고려의 건국설화에서 비롯되었다. 

  개성은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고향이며, 고려왕조의 수도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시대, 어떤 풍수가가 왕건의 조상에게 말하기를, 그 땅의 산에 많은 소나무를 심으면 후손 중에 삼한을 통일할 영웅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예언에 따라 산에 암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나무를 빽빽히 심은 것이, '소나무 산' 이란 뜻의 송악(松嶽)이란 지명의 유래라는 것이다.  그 산도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그 후 송악산(松嶽山)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송악은 고려의 수도가 된 직후에는 개주(開州)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개경(開京)으로 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송악이라는 이름은 물론이고, 그 '송악' 이 이제 한 나라의 수도(都)가 되었다는 뜻까지 더해져서 붙여졌을 송도(松都)라는 이름까지, 비록 행정구역상의 정식 명칭은 아닐지라도 계속 사용되었다.

 

  그런데 송악이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이 설화는, 우리나라의 다른 건국 신화나 설화와는 많이 다르다.

  다른 건국 신화나 설화라는 것을 보면, 사람이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과 곰 또는 지렁이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기도 하는 등, 지나치게 신비성을 강조해서 어떤 때는 좀 유치해보이기까지 하다. (신화, 설화의 상징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 단지 느낌상 유치하다는 것 뿐임. ^^;;)  그에 비해, 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소나무를 심어 새로운 나라를 여는 인물을 얻었다는 설화는, 제법 현실적이게 느껴진다.

  1차 산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던 시대에, 벌거벗은 산보다는 푸르른 산이 있는 지역이 보다 많은 사람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현대사의 망국병인 지역주의와는 다른 의미의 지역주의가 강했던 그 시절에, 사람이 많은 지역이란 곧 경제력 및 군사력이 강한 지역이라는 뜻이었을테니, 아무래도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인물이 대권을 잡기에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왕건의 조상에게 소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알려줬다는 인물은 그냥 풍수가가 아니라, 요즘말로 하면 중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정치 컨설턴트쯤 되었나 보다. ^^

 

  사실 나는 개경이니 개성이니 하는 이름보다는 송도나 송악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이름에 얽힌 설화는 차지하고라도, 이름 그 자체로도 충분히 멋지고 낭만적이다.  '소나무의 도읍' 또는 '소나무의 산' 이라니, 소나무라는 것이 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아 굳은 지조를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정말 근사한 지명 아닌가?  그래서 내 기분 같아서는, 송도가 되었든 송악이 되었든, 하여튼 옛 이름으로 되돌리고 싶을 정도다.  내가 아무리 이 이름들을 좋아해봤자 개성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는 북한이 눈 하나 꿈쩍 안 할거라는 뻔한 사실이 너무 아쉬울 만큼 말이다. ㅠ.ㅠ

 

 

 

  개성(開城)은 '조랭이떡국' 과 '화관' 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개성이라는 곳이 처음부터 내 뇌리에 한 자리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개성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때 '왕건(고려 태조)' 에 관한 위인전을 읽었을 때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게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한 개성이란 지명은, 그 후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 옛날 고려의 수도였다고 국사시간에 수박 겉 핥기로 다루는 정도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한 후, 개성의 존재감(!)이 보다 강해졌다.  다름 아닌, 고등학교 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간 인사동 음식점에서 맛보게 된 '조랭이떡국(조랭떡국)' 과 박완서의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 '미망' 에 나오는 화관 때문이었다. 

 

  '조랭이떡국' 은 개성 특유의 떡국이다.

  남자아이들이 많이 가지고 노는 구슬(일명 '다마') 크기의 동그랗고 하얀 떡 두 개를 옆으로 붙여놓은 것 같은 모양새라, 어떻게 보면 초미니 눈사람을 옆으로 쓰려뜨려 놓은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껍질을 까지 않은 땅콩처럼 보인다. ^^  사실 조랭이떡국의 맛은 우리가 먹는 보통 떡국과 다를 게 없다.  조랭이떡이나 가래떡이나 모양만 다르지, 결국 재료는 그게 그거라, 맛이 특별히 다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특이한 모양의 떡국은, 그 때까지 다른 음식은 몰라도 떡국만큼은 지방색 없이 전국통일형(?)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문화충격(!)을 줬다.  차라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나 경상도에 이런 특이한 떡국이 있었더라면, 잠깐 신기해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성은 서울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물론 지금은 개성에 코 닿게 하겠다고 엎어졌다가는, 그 코가 휴전선에서 인민군 또는 국군이 쏜 총에 뚫리기 십상이겠지만... ^^;;)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관' 은 박완서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드라마 '미망' 때문에 알게 된 또 하나의 개성 풍습인데, 혼례식 때 신부가 쓰는 관을 말한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태임(채시라)의 혼례식 때, 태임의 신부 차림새가 특이했다.  나는 그 때까지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에서는 아주 당연히 신부 머리 위에 족두리가 올라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여승들이 쓰는 고깔 비슷한 모자를 온갖 색깔의 꽃(단, 생화가 아니라 종이꽃이었던 것으로 기억함.)으로 뒤덮어 장식한 화관이 나왔다. (물론 이 드라마에 나온 화관이 실제 개성의 화관 모습을 얼만큼이나 제대로 고증해냈는지는,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임. ^^;;)  이 화관 역시 조랭이떡국 만큼이나 나에게 문화충격을 줬다.

  나중에 이 드라마의 원작소설인 '미망' 을 읽어보니, 이 화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나왔다.  그 화관을 꾸미는 일은 혼례가 있을 때마다 적당한 사람이 나서서 하는 게 아니라, 지역별로 손재주가 뛰어난 여인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화관을 단순히 예쁘게 꾸미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화관을 이용해서 신랑과 신부의 외모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한단다.  즉, 신부가 워낙 미인이라 상대적으로 신랑 인물이 못나 보이면, 일부러 화관을 화려하게 꾸미는 방법으로 그 화관 아래 신부의 미모를 살짝 죽인다.  반대로 신부가 신랑에 비해 미모가 좀 쳐진다 싶으면, 화관을 다소 수수하게 꾸며 신부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보통 장식품이라는 게 착용하는 사람의 외모를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인데, 이 화관은 착용자(신부)와 상대방(신랑)의 기우는 정도를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니, 참 특이한 장식품이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런 역할 때문에 혼례식 장식품으로 아주 적절한 의미가 있기도 하다.  자기 혼자만 예쁘면 그만인게 아니라 신랑과의 균형을 맞춰주는 장식품이라니,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게 부부 쌍방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대학 시절부터 내 관심권 안으로 들어온 개성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인상은, 거의 작가 박완서에게서 비롯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개성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8.15 해방 후 38선 이남에 속했던 개성은, 유감스럽게도 한국전쟁 후 휴전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니 통일이 되기 전에 내가 반드시 개성에 가보려면,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에 위장취업이라도 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듯 하다. -.-;;

  그러니 내가 개성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나 자신이 보고 느낀 이미지가 아니라, 남의 눈과 귀를 통해 간접적으로 형성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나에게 개성에 대한 어떤 감상과 인상을 전수(?)해준 사람이 바로 박완서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를 보면, 두 책에서 모두 개성의 모습을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 로 묘사하고 있다.

  박완서는 개성 근처의 시골에서 나서 자라다가, 8살 때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처음으로 개성에 갔다.  겨우 20여 가구 밖에 없는 시골마을에서 살던 아이의 눈에, 산고개 위에서 내려다본 개성의 모습은 웅장한 대처였다.  개성은 박완서의 고향마을에 비해 규모만 큰 게 아니라, 은색으로 빛나 보여서 더욱 경이롭게 보였다.  송도고보와 호수돈고녀 등 요즘말로 하면 랜드마크라 할만한 신식 건물들이 거의 화강함으로 이루어졌고, 개성의 토지가 사질이라 길이나 바위가 유독 하얀색으로 보여서, 온 개성이 은빛으로 아름답게 빛났던 것이다. 

 

  개성에 대한 박완서의 이런 인상은 나에게도 그대로 옮겨졌다.  

  만일 다른 지역에 대해, 그리고 다 큰 사람이 본 지역에 대해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 와 같은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을 보았다면, 그저 진부하다는 느낌 밖에 안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성이 지금으로서는 갈 수 없는 미지의 땅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 미사여구가 논밭과 산 이외의 세상을 몰랐던 8살 아이 눈에 강렬하게 비친 별천지의 첫인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 라는 개성의 인상은 내 머리 속에도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박완서의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 그 곳은 바로 개성...

 

  박완서는 자신의 고향 개성(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는 개성 바로 옆 개풍(開豊)의 시골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개성과 합쳐졌다고...)을 평생 잊지 못 했다.

   옛 사람들의 고향 관념이라는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미 상당히 진전된 후 태어난, 더군다나 토박이는 극히 드물고 온통 지방 출신자들과 그들의 후대로 꽉꽉 들어찬 서울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다.  나에게 고향이란 '어떤 사람이 태어난 곳' 이라는 아주 간단명료한 개념이다.  그리고 나처럼 서울 태생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내 고향은 00산부인과' 라는 썰렁한 농담이 다 유행했겠는가... -.-;;)  하지만 옛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단순히 태어난 곳이 아니라, 그 지방과 자신을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묶어버리는 주술이며, 설사 외지에 나가 생계를 꾸리다가도 죽을 때에는 꼭 돌아가야 하는 어떤 절대적이고 신성한 땅이었다.

  박완서 역시 이런 옛 사람의 고향 관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박완서가 고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기간은 겨우 8년의 유년기였고, 그 후로는 쭉 서울에서 살면서 방학 때나 겨우 고향에 돌아갔을 뿐이다.  그나마 20살 때 터진 한국전쟁 후로는 고향이 북한땅이 되어버린 통에 두 번 다시 고향에 가지 못 했으니, 박완서가 일생을 보낸 곳은 사실상 서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보면 '나는 개성 사람' 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드러난다. 


  박완서의 그런 절대적인 고향 사랑과 그리움은,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나온다.

  내가 처음 읽은 박완서의 작품이 위에서 이미 이야기한 '미망' 인데, 개성 토박이이며 거상인 할아버지의 유산과 정신을 이어받은 여걸 태임의 이야기다.  이 소설 속에서는, 고려시대에는 개성이 이 땅의 수도였다는 개성인들의 긍지,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거란은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다.' 며 만부교에 묶어놓고 굶겨죽인 패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며 조선왕조에 출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 시대 천시하는 상인의 길로 들어선 송상들의 자존심이 묘사된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이 '잊지 못 하다' 는 의미의 '미망(未忘)' 이어서, 작가가 고향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후 이 책이 재출간 되면서, 마치 정지용의 시 '향수' 중 한 구절을 연상케하는 '꿈엔들 잊힐리야' 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어쩌면 정말로 정지용의 향수에서 이 제목을 따왔을런지도 모르겠음. ^^), 고향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더 강하게 보여준다.  그냥 잊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조차 잊지 못한다니, 아마도 작가가 말년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져 제목을 그리 바꾼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언젠가 은빛으로 빛나는 도시 개성에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박완서가 개성을 처음 봤던 것이 1930년대 후반이니, 지금의 개성은 분명히 많이 변했을 것이다.

  어쩌면 통일이 되든 남북간 교류가 활발해져서든 내가 개성을 갈 수 있게 되더라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에서 박완서가 묘사한 개성과는 너무 다른 개성의 모습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아예 실망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역시 꿈은 꿈대로 그냥 둘 때가 제일 좋아, 꿈과 현실은 다르지. 결국 현실은 이 모양이네.' 하며 개성에 간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개성을 내 발로 직접 밟고 내 눈으로 직접 보기를 소망한다.

  결국 인간이란, 미지의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이 자신을 실망 또는 후회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더라도, 기어이 그 실체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이미 변해버린 개성에서 박완서가 말한 '꿈엔들 잊을 수 없는 은빛으로 빛나는 도시' 의 몇몇 흔적은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