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생활기/'09~'10년 흑룡강대학 어학연수기

1일 서예 강습회 참가기

Lesley 2009. 6. 7. 23:35

 


  한국에서는 현충일이었던 어제 오후, 내 푸다오 선생인 '진쥔'의 아버지가 여신 1일 서예 강습회에 참가했다.

 


 ※ 서예의 국가별 다양한 명칭

  그런데 우리가 '서예(書藝)'라고 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한다.

  중국어 배우면서 중국에서는 서예를 서법이라 한다는 것은 배워 알고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서도라 한다는 것은 이번 강습회에 참가한 일본 학생의 말로 처음 알았다.  그래도 역시 나는 서예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글을 이용한 예술'이라니, 정말 멋지고 낭만적이지 않은가...! ^^

 


  진쥔은 다음달 초에 졸업할 예정인데(중국은 서양처럼 9월에 신학년이 시작하는 학제라, 여름에 졸업함), 졸업 때에는 아버지가 많이 바쁘셔서 오실 수 없어서 대신 이번에 미리 오신 것이다.  
  말이 좋아 같은 나라지 워낙 땅덩어리 넓은 나라다 보니, 진쥔의 집인 청두(成都: 팬더 연구소로 유명한 쓰촨성의 성도) 근처에서 여기 하얼빈까지는 너무나 멀다. (정작 외국인 한국 인천공항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청두까지는 비행기로 가면 5시간, 기차로 가면 38시간 걸린다고 한다... -.-;;)  그래서 진쥔의 어머니가 진쥔의 입학 무렵에 한 번 다녀가셨고, 아버지는 이번에 처음으로 하얼빈에 오신 것이라 했다.  그런데 마침 아버지가 서예로 유명하신 분이라 하여, 진쥔이 자신의 룸메이트들과 우리 몇몇 외국인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쳐주시도록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서예 강습 장소로 갔다.

  기껏 하루짜리, 아니 정확히는 하루도 아니고 겨우 몇 시간짜리인데, 가르쳐주시면 얼마나 가르쳐주실까 싶었다.  또 내가 서예에 무슨 대단한 관심이나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왕 중국에 왔는데, 비록 살짝 맛보는 수준이긴 하지만 중국문화를 이것저것 골고루 경험해봐야지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강습회 장소로 정해진 우리 반 교실 문을 여는 순간, 그만 '헉...!' 하고 말았다...!   한 눈에 봐도 그냥 '살짝 맛보기' 수준이 아니었다.  언제 그렇게 했놓았는지 교실 책상들을 끌어모아 ㄷ자 형으로 배치해놓았고, 칠판에는 역시나 서예로 유명한 분답게 멋들어진 글씨로 중국 서예의 역사에 관해서 판서를 해놓으셨고, 교탁으로 쓰려고 앞에 모아놓은 몇몇 책상 위에는 서예용 종이(우리나라의 화선지와는 다름) 뭉치와 우리에게 보여줄 왕희지 등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 사진첩들과 먹물과 붓이 잔뜩 있고...


  난 외국인 학생은 나와 내 주위의 한국학생들 몇 명만 오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맑은 술'도 우리보다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이 '맑은 술'이라는 남학생은 우리 반 일본인 학생 중 한 명인데, 그 성이 淸酒이다. (아마도... 이 학생 조상님들이 주류업에 종사하셨던 듯...? ^^;;)  공교롭게도 한국의 술인 '청주'와 같은 한자를 쓰고, 뜻을 그대로 풀면 '맑은 술'이란 뜻이어서, 우리 한국학생들끼리 청주에 대해 말할 때면 가끔 장난으로 '맑은 술'이라고 부르곤 한다. ^^


  하여튼 진쥔을 포함한 중국학생 4명, 우리 한국학생 4명, 일본학생으로는 '맑은 술' 1명이 참여한 강습회는 오후 3시가 좀 안 되어 진지하면서도 적극적인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진쥔의 아버지는 1시간 정도 중국 서예의 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셨다. (전체적으로는 진지하신데 중간중간 코믹한 면모를 보이시는 게, 진쥔과 비슷했다. ^^)  사실 진쥔 아버지의 설명을 알아듣는 건 무척 힘들었다.  진쥔이야 대외한어과 출신인데다가 그 동안 푸다오(과외) 교습도 여러 번 해봐서, 외국 학생들의 중국어 실력을 잘 알고 있고 또 어떤 식으로 중국어를 말해야 외국 학생들이 쉽게 알아듣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진쥔의 아버지는 그 분 딴에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하려 애쓰시는 듯 했지만, 확실히 여기 선생님들이나 대외한어과 학생들이 하는 말에 비해서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분 강의 중 30% 정도나 알아들었나 모르겠다. ㅠ.ㅠ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이 그냥 말씀만 하셨으면 거의 이해 못 했을텐데, 칠판에 글을 써가며 설명하셨고, 또 강의 내용이 전에 한국어로 듣고 본 적 있는 내용들이라 그럭저럭 이해했다.


  그렇게 진쥔의 아버지는 서예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끝내신 후, 학생들에게 종이와 붓을 나눠주며 붓글씨를 쓰게 하셨다.
  중국학생들의 경우, 어려서부터 서예를 어느 정도 익혔는지 다들 잘 쓰는 편이었다.  특히나 진쥔은 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운 적이 있고, 대학 입한한 후에도 1년인가 2년인가 서예를 했었다고 하더니, 역시나 군계일학 수준이었다. ^^

  그러나 우리 외국인 학생들의 경우, 당연히 글씨를 쓴다기 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수준에 가까웠다... ^^;;  그나마 중학교 때 1년 가까이 서예학원 다닌 적 있고, 유별난 고등학교 다닌 덕에 1주일에 한 시간씩 서예 수업을 받아야했던 내가 아주 조금 나은 편이었고...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건교이념이 '전통여성의 내훈(內訓)'이었으니, 말 다 했다... ㅠ.ㅠ  지금도 그 건교이념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건교이념에 대해 요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심히 궁금하다... -.-;;)

 
  전문적인 서예가는 아니시라는 진쥔 아버지의 서예 실력은, 문외한인 우리가 보기에도 뭔가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우리 한국학생들 모두 서예 쪽으로는 아는 것이 도통 없건만, 스스로 배우고 익힌 것이 아닌, 그저 나이가 들면서 세월의 흐름이 자연스레 가져다 준 지혜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어째 그 자리에 모였던 한국학생들이 모두 무슨 노인대학의 노인학생들인 듯한 느낌이... ^^;;)  서예작품을 어찌 감상하는 건지 전혀 모르건만, 그 분이 서예 시범 보이시는 것 보면서 '대단하다, 글자 간에 균형이 잘 맞아.'라든지 '인장 찍고 안 찍고 차이가 큰 것 같아요.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등의 말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

   
  6시 안 되어 강습회를 끝내고, 책상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먹물이 묻은 책상과 교실바닥을 청소하면서, 한국학생들끼리 '정말 괜찮았어.', '안 왔으면 억울할 뻔했지?' 등의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청소할 때, 나는 내 짝 앞자리의 일본 할아버지 - 이 분은 이미 60대인, 우리반의 최고령자이시다 - 책상을 특별히 신경써서 닦았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더니만 꼭 별 것 아닌 일로 삐치시고 한 번 삐치시면 꽤 오래가는데, 자기 자리 더럽게 해놨다고 또 삐치실까 두려워서... -.-;;)


  어제의 서예 강습회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던 듯 하다.
  진쥔 아버지의 서예 시범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예전에는 지루하게만 생각했던 서예가 흥미롭게 느껴진 것도 그렇고... (이러다가 뜬금없이 이 나이에 서예 공부하겠다고 나서서 설치는 것은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