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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민의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헌법재판소 결정 20'

Lesley 2020. 9. 13. 00:11

  몇 달 전에 '김광민' 이라는 변호사가 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헌법재판소 결정 20' 을 읽었다.

  제목만 보면 '발칵 뒤집은' 이라는 부분 때문에 조금 경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제목 위에 작은 글씨로 붙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건' 이라는 부제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해방 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헌법재판소 결정을 통해 훑어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김영란 전 대법관(네,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바로 그 분입니다~~)의 '판결과 정의' 라는 책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게다가 두 책 모두 법을 통해 우리 사회의 흐름을 살펴보는 책이다.

  차이점을 들자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대한민국을...' 이 제목 그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판결과 정의' 는 대법원 판결을 소재로 삼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을...' 의 저자는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지 우리나라의 영화나 드라마 내용 혹은 언론에 크게 보도된 유명인(배우 등)의 스캔들을 예로 들고 있어서, '판결과 정의' 보다 독자친화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목적과 비슷한 소재로 나온 두 책의 판매량을 보면, '판결과 정의' 의 압승이다. 

  아무래도 저자의 인지도 측면에서 '대한민국을...' 이 '판결과 정의' 에 밀릴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독자로서 아쉬운 일이다.  물론 '판결과 정의' 도 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을...' 이 좀 더 우리 생활에 밀착된 느낌으로 다가오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영화, 드라마, 스캔들이 수시로 나와서... ^^;;)

 

 

 

  20개의 헌법재판소 결정에 관한 설명을 일일이 쓰는 것은 곤란하고...

  이 책에 제일 먼저 나오는,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 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관해서만 간단히 쓰도록 하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아이들끼리 모여 있다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부모님 성함 대기 배틀(?)이 벌어졌다. 

  그런데 한 남자 아이가 자기 엄마와 아빠 성함이 '이00' 라고 하면서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갔다.  여러 아이가 그 아이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즉슨, 성씨가 같은 사람끼리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성씨가 같으면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못 들어봤기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에 대해 어설프게(!) 듣고서 같은 성씨끼리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민법이 1958년에 제정되었는데, 이때 동성동본 간에 혼인을 피하던 관습이 법으로 흡수되었다.

  당시 국회에서도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을 민법에 둘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옛날 관습을 지키고자 하는 쪽의 입김이 강해서, 결국 민법에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이 생겼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코찔찔이 초등학생들이 '성씨 같은 사람끼리는 결혼 못 해.' 라고 당연히 생각했을 만큼, 우리나라 결혼 제도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니 지금 시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규정이지만, 적어도 이 규정이 생겨났던 시절에는 그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지만...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은 처음부터 존재의 이유가 빈약했던 규정이었다.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을 지지했던 세력, 즉 유림 등 보수적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첫째,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이 사라진다면 유전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주장이다.  동성동본인 사람들은 서로 친척 사이라 유전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들이 결혼해서 낳는 자식들이 유전성 질환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도덕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주장이다.  즉,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나온 친척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 모두 옳지 않다.

 

  먼저, 유전적인 문제를 걱정해서 먼 친척 간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라면, 부계 혈통 간의 결혼과 모계 혈통 간의 결혼을 모두 막아야 한다.

  우리는 부모 양쪽으로부터 유전자를 절반씩 물려받는다.  그런데 부계 혈통(동성동본) 간의 결혼만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모계 혈통 간의 결혼은 방치(?)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부계로 30촌인 친척과 모계로 10촌인 친척이 있다고 하자.  동성동본 결혼 금지 규정이 있던 시절에는, 친척이라고 하기도 힘든 부계 30촌과는 결혼할 수 없지만 그나마 가까운 친척인 모계 10촌과는 결혼할 수 있었다.  유전성 질환이 그토록 무섭다면 혈통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결혼을 피하는 게 맞지 않나?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 중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남짓만 성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부를 축적한 평민들이 족보를 사서 성씨를 갖게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또한 일본이 식민통치를 위해 1909년에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그때까지 성씨 없이 살던 사람들이 임의로 성씨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 현재 동성동본인 사람들 상당수는 조상이 달라서 유전적인 유사성이 거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래 남남인 사람들이 결혼하겠다는데,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친척끼리 결혼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며 결혼을 막은 셈이다.

 

  이렇게 이상한(!) 규정 때문에 약 40년 동안이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동성동본인 남녀는 서로 사랑하게 되어도 혼인신고를 못 하니 동거할 수 밖에 없었다.  21세기인 지금도 동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못한데, 20세기에 동거를 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마저 혼외 자식이 되는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동본인 사람들의 혼인신고가 무효가 아닌 취소 규정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담당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혼인신고를 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참 디테일하게도, 1977년에 짜장면 한 그릇이 500원 정도였는데 공무원에게 3만원에서 20만원의 뇌물을 줘야 했다고 설명하고 있음.)  불법적인 방법으로라도 혼인신고를 하려던 사람들의 처지가 눈물겨울 정도다.

 

  정부에서도 이 규정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동성동본 결혼 금지 규정이 폐지되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특별법을 시행하여 동성동본 커플들을 구제했다.  1977년, 1987년, 1995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한시적으로 동성동본인 남녀의 혼인신고를 받아준 것이다.

  이 특별법으로 구제된 동성동본 남녀가 모두 44,827쌍이나 되었다.  그러니 특별법의 적용을 받기 전에 불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한 사람들이나 억지로 헤어져야 했던 사람들까지 합치면, 동성동본 결혼 금지 규정으로 고통 받았던 이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1997년에 헌법재판소에서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05년도 개정 민법에서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이 삭제되었다.  정부에서 세 차례나 특별법을 시행해서 동성동본 간의 혼인신고를 받아줬다는 사실만 봐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기 이전에 이미 이 규정은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헌법불합치 결정은 예정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어려서 봤던 드라마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하필이면 동성동본 사이라 갈등을 겪는 커플의 사연이 나왔다. 

  이제 동성동본 때문에 결혼에 문제 생기는 일은 없으니, 드라마의 주요 소재(특히 막장 드라마의 소재)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앞으로 100년쯤 지나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이 있던 시대를 겪어보지 못 한 사람만 사는 세상이 되면, 동성동본 혼인 금지 규정은 역사 속의 어처구니 없는 제도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사극 속 진귀한(?) 소재로 부활할지도 모르겠다.

 

 

 

  기타

  

  1. 위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의 책에 대해 언급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책에 나오는 헌법재판소 결정 중에 '김영란법' 에 대한 것도 있다.  이래저래 이 책과 김영란은 인연이 있는 듯하다.

 

  2. 이 책에 나오는 20개의 헌법재판소 결정 중 지금까지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들로, 성(性)에 대한 것들과 병역에 대한 것들이 있다.  전자로는 간통죄에 관한 결정 및 성매매죄에 관한 결정, 그리고 후자로는 여성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결정 및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결정이 있다.  양쪽 모두 지금까지 논란이 많은 사항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기존의 헌법재판소 결정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