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정약용이 만들고 지석영이 덧붙인 '조선시대 영어교재 아학편'

Lesley 2018. 5. 29. 00:01

 

 

 

 

  오늘은 '아학편' 이라는 무척 독특한 책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책이 생겨난 과정도 독특하고 책의 내용도 독특하다.  그리고 이 책의 목적이랄까 혹은 초점이랄까 하는 것이 현대에도 통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왼쪽은 띠지가 둘러진 모습.

오른쪽은 띠지를 벗겨낸 후의 모습.

 

 

 

  일단,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이라고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책이 두 종류로 나뉜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공동저술했다는 뜻은 아니다.

  두 저자가 동시대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공동저술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 저자는 19세기 전후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 인데, 천자문을 대신할 한문 교재로 이 아학편을 썼다.  그렇게 정약용이 이미 완성해 놓은 책을, 20세기인 개화기에 들어서 두번째 저자라 할 수 있는 '지석영' 이 영어 교재로 업그레이드(?)했다.

 

  결국 아학편이란 책은 정약용이 저술했던 원본과 지석영이 손을 댄 편집본 내지 수정본으로 나뉜다.

  본래 목적에 충실한 '한문 교과서' 버전 및 나중에 지석영이 새롭게 손본 '영어 교과서' 버전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면 이 책이 두 가지 버전으로 나온다.  

 

 

  정약용이 천자문을 대신할 한문 교재로 아학편을 집필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조선시대 학생들이 처음 배우는 책은 '천자문' 이었다.

  천자문은 제목 그대로 1,000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한문과 유학을 배우기에 앞서, 일단 개별 한자를 배워야 하는 아이들에게 적합한 교재로 여겨졌다.  즉,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영어 기초단어 1000개 정복' 혹은 '초급영어 필수단어 1000개 완성' 같은 류의 책이었다.

 

  하지만 천자문은 아이들의 교재로 쓰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원래 천자문은 한문 교육 입문용으로 만든 책이 아니기 때문에, 천자문에 나오는 글자 중에는 난이도가 높은 글자(기초 단계에서는 몰라도 되거나 획수가 복잡한 한자)가 제법 많다.  게다가 산문이 아닌 운문이기까지 하다.  즉, 천자문은 중국의 역사나 문화를 소재로 하여 4글자씩 묶어서 총 250구로 엮은 일종의 시집이다.  그러니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해서 역사니 문화니 시니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로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아이들은 무슨 내용인지 모르면서 덮어놓고 달달 외워야 했다. 어린이용 교재치고는 꽤나 비효율적이었던 셈이다. (영어공부를 처음 시작한 아이가 영국의 역사 및 문화와 관련된 단어 1,000개를 외워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조선시대의 여러 학자들이 그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어린이용 교재를 만들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고등학교 때 조선 중기의 국어에 대해 배우면서 언급되는 최세진의 '훈몽자회' 가 있다.  최세진은 천자문이 한문 교육 입문서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천자문을 대신할 교재로 훈몽자회를 썼다.

  여담으로, 현대에 와서 훈몽자회는 원래 목적대로 한문 교육용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학생들을 미치게(!) 만드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즉, 한국어 고문(고문은 '고전 문법' 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크나큰 괴로움을 안겨줘서 고문이기도 함. ㅠ.ㅠ)을 위한 연구자료로 쓰이고 있다.

 

  정약용 역시 천자문을 대신할 목적에서 아학편을 저술했다.

  일단, 배워야 하는 글자수를 2,000개로 늘여서 천자문보다 쉬운 교재를 기대했을 게 분명한 아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으악, 천자문보다 학습량이 2배로 늘어났잖아...!" 하는 비명이 들리는 듯... ^^;;)

  그 대신 어려운 책을 배울 때나 필요한 한자는 제외하고 기초학습이나 실생활에 유용한 한자들을 수록했다.  또한 글자들을 기억하기 쉽도록 일정한 관계에 따라 묶어놓았다.  예를 들어 아학편의 첫 페이지는 '天地(하늘과 땅), 父母(아버지와 어머니), 君臣(임금과 신하), 夫婦(남편과 아내), 兄弟(형과 동생), 男女(남자와 여자)' 로 시작한다.  반대되는 글자 혹은 대조를 이루는 글자를 두 글자씩 묶은 것으로, 그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도 일상 중에 자주 사용하는 글자 및 단어들이다. 

 

 

  개화기를 맞아 아학편이 영어 교재로 재탄생하다.

 

  이렇듯 처음에는 한문 입문 교재로 탄생했던 아학편이, 정약용 사후 약 70년이 지나서 지석영에 의해 영어 교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지석영이란 인물은 개화기 때 종두법 보급 및 국어 연구에 힘쓴 인물이다. (이 몸은 학창시절 역사를 배우면서 지석영과 주시경이 항상 헷갈렸다는... -.-;;)

  지석영은 한자가 아직 지식인의 필수 교양으로 통하던 시절이란 점을 고려했는지, 2,000개의 기초 한자로 이루어진 아학편을 기초 영어단어를 익히기 위한 교재의 모체(?)로 삼았다.  그리고 각 한자 옆에 3개 국어로 뜻과 음을 달았다,  즉, 우리 고유의 한글, 조선땅에서 점점 세를 불리던 일본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영어로 뜻과 음을 적인 것이다. 

 

  

  예스러운 사철제본으로 된 '조선시대 영어교재 아학편' 이 나오다.

 

  내가 지난 봄에 구입한 아학편은 '조선시대 영어교재 아학편' 이란 제목으로 나온 책이다.

  '정약용이 만들고 지석영이 덧붙이다' 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편집 상태도 독특하다.

 

 

 

 

참으로 예스럽게 생긴 책이구려... ^^

 

 

  이런 식의 제본을 '사철제본'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극에 나오는 논어니 맹자니 하는 옛날 책들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지석영이 처음 세상에 내놓았던 1908년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디지털 시대 속에서 아날로그적인 것을 탐하는 요즘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것인지, 사철제본 상태로 출간되었다.

  요즘의 책에는 다 있는 등짝(?)이 없어서 때가 쉽게 탈 것 같기도 하고 습기에 약할 것 같아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펼쳤을 때 거의 180도로 쫙 펴져서 시원한 맛도 있고, 책이 저절로 덮어질까봐 한 손으로 책을 누르고 있을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독특한 모양새에 끌려 소비자의 지갑이 절로 열린다. (네, 바로 이런 목적에서 출판사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사철제본을 선택했겠지요. ^^) 

 

 

 

인쇄 및 발행 날짜에 융희(隆熙)라고 되어 있어서

순종 황제 시절에 낸 책임을 알 수 있음.

 

 

 

각 한자를 한글, 영문, 일문으로 뜻과 발음을 적음.

(1타4피...! ^^)

 

 

 

 

Lie는 '을나이'...!

Rise는 '으라이쓰'...!

 

 

  우리는 영어 광풍이 부는 나라에 살고 있지만 회화에 유독 약하다.

  영어 교육이 입시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회화를 등한시하기 때문인데, 자연히 회화의 기본인 발음도 엉망이 된다.  물론 외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 발음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고, 조리있게 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긴 하는데...  말 그대로 발음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 가 없는 것이지, 발음에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현지인이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발음을 익히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의 영어 발음은 우리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한글' 로 영어 발음을 표기하다니, 얼핏 생각하면 그야말로 콩글리쉬 발음이 아닐까 싶은데...  의외로 참신한(?) 표기 방식이다.

  L이나 R을 한글로 표기하라고 하면 보통은 둘 다 ㄹ로 표기해서 마치 L과 R이 같은 발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L을 발음할 때에는 먼저 '을' 이라고 한 후에 ㄴ으로 발음하고(그런데 왜 ㄹ이 아닌 ㄴ일까...), R을 발음할 때에는 '으' 라고 한 뒤에 ㄹ을 발음하게 한다.  요즘 인터넷 등에서 영어권 사람들과 비슷하게 발음하는 방법이라며 써놓은 요령과 흡사하다. 

 

 

 

 

 

Word는 '우어드', Speech는 '스피취' 임. ^^

 

 

  W는 '워' 가 아닌 '우어' 로, 또한 CH는 '치' 가 아닌 '취' 로 표기했다.

  이런 식으로 발음하면 외래어표기법대로 발음하는 것보다는 한결 원래의 발음에 가깝게 들리게 된다.  사실, 외래어표기법은 말 그대로 '외래어' 를 위한 것이지 '외국어' 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Word나 Speech를 외래어표기법대로 '워드' 나 '스피치' 라고 발음하면서 '어째서 내 영어 발음이 안 좋은 걸까?' 하고 한탄하는 건 곤란하다. (물론 이렇게 쓰고 있는 나도 영어를 읽을 때면 습관적으로 그냥 '워드' 나 '스피치' 라고 발음한다는... ^^;;)

 

  이 책에서 굳이 한글로 영어발음을 표기한 이유는 모르겠다.

  개화기 때에는 아직 발음기호라는 게 없어서 한글로 영어발음을 표기한 것인지...  아니면 영어가 막 보급되는 단계라서 영어교육 방식이 주먹구구식일 때라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한글로 표기한 것인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석영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의 지식인들이 오히려 지금의 우리보다 외국어를 배울 때 발음에 더 신경썼다는 점이다.  전에 개화기 때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의 수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영어를 전혀 접해보지 못 한 사람들의 영어 학습 속도가 무척 빠른 것에 감탄하는 대목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 때문에 영어를 배우면 출세길이 열린다는 등의 다른 이유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발음 등 회화에 신경쓰며 공부한 것도 좋은 성과를 거두는 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는데, 이 책을 독서용으로 사지는 않았다.

  완전 소장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반쯤은 소장용으로 샀다고 할까? ^^  전에 구입했던 백석의 '사슴' 처럼 지름신을 강림시키는 독특한 모양새에 반해서 충동구매(!)를 했다.  소와다리 초판본 시집 '사슴(백석 시집)' - 출판계에 불어닥친 복고풍(http://blog.daum.net/jha7791/15791284) 

  그래도 또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삘(!) 받아서 아학편에 나오는 한자와 영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공부하겠다고 무모하게 달려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