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디어드라 마스크의 '주소 이야기'

Lesley 2023. 2. 6. 00:01

  '디어드라 마스크' 가 쓴 '주소 이야기' 에 관심 갖게 된 이유는 이 책의 목차 때문이다.

  책 제목만 보면 딱딱한 책이나 유치한 책으로 여기고 넘겼을 텐데...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목차를 보니 제7장에 '한국과 일본 / 도로명 주소와 번지 주소의 차이' 라고 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이래 번지 주소 체계를 채택했는데 2010년대 들어서 도로명 주소 체계로 개편했다.  당시에도 쓸데없는 짓에 세금 낭비한다는 비판이 많았고,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도로명 주소가 완전히 자리잡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책에 그런 우리나라 주소에 대해서 나온다고 하니 없던 관심이 생겨 읽게 되었다.  

 

 

 

  부제로 붙은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가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잘 요약하고 있다.

  지금이야 주소라는 것이 우리 일상 속에 당연하게 존재하기에 그 중요성이나 의미를 실감하기 힘들다.  그저 막연하게 '요즘처럼 뭐든지 인터넷으로 배달시키는 시대에 주소가 없다면 배달이 안 되어 곤란하겠네' 정도의 생각이나 들 뿐이다.

  하지만 주소의 역사는 무척 다이나믹하다.  세수를 늘리고 징병을 쉽게 하려는 지배계급과, 세금 납부 및 군입대를 피하려는 피지배계급이, 주소를 두고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이곤 했다.  또한 거리 이름에는 자기 동네의 이미지와 집값(예나 지금이나 집값은 매우 중요함...!)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언어와 같은 문화적 요소가 주소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빈민들의 빈곤 탈출 vs. 빈민 속의 범죄자 체포 

 

  잠시 삼천포로 빠져서...

 

  대학 때 교양수업을 들으며 조선시대 인구 통계가 부정확한 이유를 듣고 황당함을 느꼈더랬다.

  조선시대에는 교통, 통신, 행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으니 인구 통계가 '어쩔 수 없이' 부정확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부러(!) 인구 조사를 대충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온 인구 통계도 부정확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 같으면 공직자들이 업무를 게을리 한다고 비난받을 일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조선시대에는 착한(!)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인구 조사를 대충 해야 하고, 나쁜(!) 정치인이나 인구 조사를 정확히 한다고 생각했다. 

 

  인구 통계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 국가의 효율적인 행정업무 처리 및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확한 인구 통계가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배계급인 양반들은 인구 통계를 '가난한 백성에게 세금을 쥐어짜내기 위한 수단' 으로 봤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 통계를 대충 내서 백성들이 적당히 탈세할 수 있는 구멍을 내주는 것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도리' 라고 여겼다. (가령, 한 집안에 세금 부과 대상자가 5명인데 공문서에 3명만 기재된다면 2명 분의 세금을 안 낼 수 있으니...)

  교수님에게 설명을 들으며 '그러니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망했지' 라고 생각했다.  세금을 내야하는 백성 입장에서야 그런 잔머리를 굴릴 법도 하지만,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선시대 양반들의 관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빈민이 많기로 유명한 인도의 대도시 콜카타에서 한 시민단체 사람들과 함께 다니며 그들의 사업을 취재했다.  저자가 이때 겪은 일에서 주소를 보는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이 나온다.

 

  그 시민단체는 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수많은 무허가주택에 주소를 붙이는 활동에 나섰다.

  얼핏 생각하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과 주소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주소는 빈곤 탈출을 위한 기본 토대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 활동을 하려면 은행 계좌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은행은 주소가 없는 사람, 즉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에게는 계좌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면 취업을 하더라도 월급을 받기 곤란하고, 작은 사업이라도 벌일 밑천을 마련하기 위한 대출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주소가 없으면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없어서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민단체는 주소 부여 사업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은 시민단체와 전혀 다른 각도로 주소 부여 사업을 바라봤다.

  저자와 시민단체 회원이 주소 부여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서류에 서명을 받으려고 그 지역의 국회의원을 만났다.  국회의원이 선선히 서명을 해주었다길래 사업의 취지에 공감했나 보다 했는데...  그 국회의원은 "그 지역에는 범죄자가 많아요.  주소가 있으면 범죄자들을 잡을 수 있겠죠." 라고 말했다. 

 

  즉, 같은 사업을 두고 양쪽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민단체는 주소 부여 사업을 빈곤 탈출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국회의원은 빈민 중에 섞여있는 범죄자들을 보다 쉽게 체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빈곤 탈출이나 범죄자 체포나 다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치인은 국민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과, 범죄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빈민들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뜨악한 기분이 안 들 수가 없다.  조선시대 공직자들이 가난한 백성들 사정을 봐주기 위해 일부러 인구 통계를 허술히 했던 것은 차라리 인간적이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인종차별 반대 vs. 우리 동네 집값과 이미지 지키기

 

  마틴 루서(루터) 킹 목사는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킹 목사가 암살된 후 킹 목사를 기리는 뜻에서 킹 목사의 이름을 미국의 이 거리 저 거리에 붙였다.  그런데 마틴 루서 킹 거리라는 주소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차별에 반대한 사람의 이름을 거리에 붙이는 일로 인종 갈등이 불거졌다. 

  주로 인종차별 풍조가 강하게 남은 남부에서 벌어진 일인데, 흑인들이 어느 동네 거리에 킹 목사의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어깃장을 놓았다.  킹 목사 이름을 붙일 거리의 반대편 거리에는 킹 목사 암살범(!)의 이름을 붙이자고 하지를 않나, 남북전쟁 중 남부군 장군이었던 사람의 이름을 거리에 붙이자고 하지를 않나...

  

  그런가 하면 낙인 효과 비슷한 것도 나타났다.

  마틴 루서 킹 거리라는 주소가 있는 곳은 아무래도 흑인 거주자가 많은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흑인은 대체로 백인보다 가난하니 그 지역은 낙후된 곳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마틴 루서 킹 거리라는 주소가 있는 지역은 가난한 동네로 찍히고 개발에서 소외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딱히 인종차별이 만연한 동네가 아니더라도 마틴 루서 킹이라는 주소를 기피하게 된다.  동네 이미지에도 안 좋고 집값에도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서구권의 도로명 주소 vs. 일본의 번지 주소 

 

  도로명 주소를 채택한 서구권 국가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과 일본의 번지 주소는 매우 불편하다.

  도로명 주소는 가 본 적 없는 장소를 찾아갈 때 유용하다.  도로명 주소 체계를 쓰는 나라의 도시는 보통 거리가 반듯하게 나있고, 거리마다 다른 이름이 붙어 있으며, 거리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번호가 순서대로 붙어 있다.  그래서 거리 이름과 그 거리 이름에 붙은 숫자만 알면 안 가 본 장소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에 비해 번지 주소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어지간히 큰 거리가 아니고서는 공식적인 이름이 붙어있지 않고, 자잘한 블록 안에 있는 건물에 두서없이 번지를 붙여 놓았다.  어떤 지역에 처음 가는 사람이 목적지를 쉽게 찾으려면, 지도를 보거나 그 지역에 익숙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도시계획 전공자인 베리 셸턴 교수는 번지 주소가 생긴 이유를 재미있게도 문자 체계에서 찾았다.

 

  영어권 국가와 일본은 전혀 다른 문자를 쓴다.

  셸턴 교수는 어려서 영어 알파벳을 배울 때 유선지(악보로 쓰는 오선지 비슷하게 선이 4개 그어진 종이)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셸턴 교수의 일본인 아내는 처음 글자를 배울 때 네모칸이 그려진 종이(우리나라 학생들이 '깍두기 노트' 라고 부르는 것)를 이용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본에서는 글을 쓸 때 한자(간지)를 많이 섞어 쓰는데 한자는 기본적으로 네모나게 생겨서 네모칸에 쓰는 게 편리하다.  그리고 여러 글자를 옆으로 붙여써야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영어 알파벳과 달리, 한자는 표의문자라 글자마다 뜻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 글자를 한 칸에 쓰는 게 맞다. 

 

  셸턴 교수는 이런 문자 체계의 차이가 주소 체계의 차이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알파벳을 쓰는 서구권 사람들은 선에 익숙해져, 지역에서도 선 모양으로 된 거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리마다 이름을 붙이고 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주소 체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자를 쓰는 일본인은 선 모양인 거리보다는 네모난 덩어리인 블록을 중요하게 여기고, 거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록 중심으로 된 번지 주소 체계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다른 학자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지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무척 흥미로운 주장이다.  지난 연말에 본 영화 '컨택트(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1997년 영화 '콘택트' 말고, 에이미 애덤스가 주연한 2016년 영화 '컨택트'...!)에도 문자 체계의 차이가 사고 방식, 더 나아가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자 체계의 차이로 공간을 인식하는 기준을 뭐에 두느냐 하는 차이가 생겼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겠나? 

 

 

 

  한국의 특이한 사례 

 

  이 책에서는 한국의 사례와 일본의 사례를 번지 주소 부분에서 함께 설명하지만, 여기에서는 별도로 쓰겠다.

 

  저자는 먼저 한국의 문자인 한글에 대해 설명한다.

  한국도 일본처럼 오랜 세월 동안 한자를 쓰다가, 15세기에 세종대왕이 한국어 음가와 중국 문자인 한자가 잘 맞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한글을 창제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일본인이 한국을 식민지배 하는 동안 한글을 말살하려 했지만, 지금 한국인은 기본적으로는 한글만 쓰고 있다는 점도 설명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인은 지역을 볼 때 일본인처럼 블록을 중심으로 보는가, 아니면 서구권 사람들처럼 거리를 중심으로 보는가?

 

  이런 의문은 한글의 특수성에서 나왔다.

  한글은 한자처럼 한 글자가 하나의 뜻을 가지는 표의문자가 아니라, 영어 알파벳처럼 글자마다 음가를 갖은 표음문자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 알파벳처럼 문자를 옆으로 쭉 나열하는 식의 문자는 아니고,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네모난 형태로 쓰는 문자라는 점에서는 여러 획을 조합하여 네모난 형태가 되는 한자와 유사하다. (그래서 한국인도 글씨를 처음 배울 때 일본인처럼 깍두기 노트를 이용한다는 점도 언급함.)

  그렇다면 한글은 한국인의 공간 개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일본인처럼 블록을 중심으로 볼까? (번지 주소)  아니면 서구권 사람들처럼 거리를 중심으로 볼까? (도로명 주소) 

 

  일단 한국이 번지 주소를 썼던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이었다.

  2010년대 들어서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며 도로명 주소 체계를 도입했다.  하지만 저자가 만난 한국인들은 모두 도로명 주소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격하게 공감이 갔음.  나부터가 도로명 주소에 여전히 회의적인 사람이라...)

 

  저자는 한국인들이 도로명 주소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를 찾다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라는 관념에 주목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을 겪은 세대라면 '세계화' 라는 단어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다.  세계화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나중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희화화되기까지 했으니...

  한국인인 내가 신기해 할 정도로 저자는 당시의 세계화에 대해 잘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예로 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세계화는 덮어놓고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쥔 서양의 문물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면서 세계 속으로 들어가자는 뜻이다.  즉, 정반대 개념인 것 같은 국제화와 민족주의를 잘 섞어놓은 것이 우리나라의 세계화였다. 

 

  저자는 한국인이 그냥 세계화가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세계화에 익숙하기에, 도로명 주소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봤다.

  시민들을 거리 이름 붙이기에 참여시켰더라면, 전통을 중요시하는 한국인들은 한국 역사 속 인물이나 절 같은 문화유산의 이름을 거리에 붙었을 테고, 새로운 도로명 주소 체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데 행정기관에서 일방적으로 거리 이름을 짓고(게다가 그 지역 특색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음), 그나마 일부 큰 거리에만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 수많은 작은 거리에는 딱딱하게 번호나 붙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 문화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은 정부가 세계적 추세를 따른다며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도로명 주소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고, 도로명 주소는 사실상 외국인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저자는 도로명 주소만 접하고 자란 세대가 한국인의 다수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한국인들이 도로명 주소보다 번지 주소를 더 편하게 사용할 지 궁금해 한다.  나 역시 이 부분이 궁금하다.  번지 주소에 익숙한 세대가 전부 사망하고 나면 그 밑의 세대는 도로명 주소를 아무 불편함없이 받아들일까? 

 

 

 

  부동산 시장에서는 위치 뿐 아니라 주소도 중요하다.

 

  전에 우리나라 아파트에 엉뚱한 지역 이름이 붙는 세태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아파트 이름이 '서초 0000 아파트' 라고 하자.  그러면 이 아파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서초구에 있는 아파트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서초구라는 지역이 부촌이라는 통념까지 더해져서, 그 아파트가 부자가 많이 사는 고급 아파트일 거라는 추측도 할 것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아파트는 서초구 밖에 있다.  아파트 주민들이 집값을 올리려는 꼼수(!)로 잘 사는 옆동네 이름을 슬쩍 이용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지금부터 100년도 전인 19세기 후반에 이미 미국 뉴욕의 상류층 인사들과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어떤 지역을 고급화하고 집값을 올리기 위해서는 주소가 중요하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이름이든 나쁜 이름이든 일단 한 지역에 어떤 이름이 고착되면 그대로 굳어지는 법이니, 좋은 이름을 선점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런던의 번화가 이름을 뉴욕 거리에 붙이는 식으로 거리 이름을 바꾸었다.  책에 그 이유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 시대만 해도 영국이 미국보다 더 선진화되고 세련되었다는 인식이 있어서 런던 거리 이름을 따와 뉴욕 거리에 붙였던 것 같다.

 

  21세기가 되자 대놓고 건물의 실제 위치와 상관없는 주소를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도 수십 년 전에 신축 건물의 주소를 변경하여 건물의 경제적 가치를 높였다.  그 건물의 원래 주소지가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은 지역이라서 보다 고급스러운 주소를 원한 것이다.  놀랍게도 뉴욕에서는 주소를 사고파는 게 합법적(!)이라 트럼프 뿐 아니라 여러 부동산 개발업자가 같은 방법을 썼다.

  그래서 뉴욕 지리에 익숙치 않은 외지인들은 이런 주소 때문에 헷갈리게 된다.  주소가 파크 애비뉴237번지인 건물은 엉뚱하게도 렉싱턴 애비뉴에 있다.  주소가 타임 스퀘어 11번지인 건물은 실제로는 타임 스퀘어 근처에 있지 않다.  이런 식으로 실제 위치와 다른 주소를 붙이는 이유는, 고급스러운 지역의 주소를 써야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 때문에 막을 수 있던 인명피해가 생기기도 했다.  실제 위치와 주소가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구급차나 소방차가 엉뚱한 곳으로 출동하여, 환자가 사망하거나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뱀발

  

  이 책에는 주소가 전염병 방역 활동에도 매우 유용했다는 내용도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 의사인 '존 스노(스노우)' 다.  그 이름을 본 순간 인기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의 주인공 존 스노우를 떠올렸는데...  나 혼자만 그랬던 게 아니다. 

 

  저자는 존 스노우에 대해 설명해 준 교수와 함께 런던의 술집에 간다.

  옛날 존 스노우가 방역 활동을 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펌프(한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던 물 긷는 펌프)가 있던 곳이 지금은 술집이 되었다.  두 사람은 그 술집에 가서 술집 바 뒤에 숨겨둔 '존 스노우 협회' 방명록을 가져다가 봤다.  방명록에 글을 남긴 사람 대부분은 '의사 존 스노우' 의 후배격이라 할 수 있는 역학자들이지만, 일부는 '왕좌의 게임 속 존 스노우' 의 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