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섬마을(?) 밖으로 나가 재난지원금 쓰기

Lesley 2021. 9. 12. 15:00

 

  최근 재난지원금 25만원을 신청하여 받았다.

  상위 12%를 제외하고 준다고 했는데, 그 12%를 가르는 기준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되어버린, 문제의 그 재난지원금이다.  12%에 해당하여 재난지원금을 못 탄 친구 왈, "야, 내가 대한민국 상위 12%라는데 나 사는 건 왜 이 모양이냐?" -.-;;

  이 와중에 나는 12% 밖에 해당하여 재난지원금을 받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기는 한데...  재난지원금 쓰는 게 은근히 골치 아프다.  내가 사는 동네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섬 아닌 섬 같은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분명히 '하남시' 에 속하지만 정작 생활권은 하남시가 아니다.  1차 생활권은 우리 아파트 단지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성남 수정구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제과점에서 빵을 사고, 이비인후과니 치과니 하는 곳에 가서 치료를 받는 일 등을 성남 수정구에서 해결하고 있다.  2차 생활권은 우리 아파트에서 도보로 10여분 정도 가면 나오는 서울 송파구라서, 과일을 사거나 은행 업무를 보러 갈 때에는 그쪽으로 간다.

  왜 이런 요상한 일이 생겼는고 하니, 우리 동네와 하남 본토(?) 사이를 산 하나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유명한 남한산성께서 계신 검단산이다.  검단산 때문에 하남 본토로 가려면 전철을 이용하든 차를 이용하든 서울로 빙 둘러가야 한다.  즉, 하남에서 같은 하남을 가는데 서울 땅을 거쳐야 한다. -.-;;  이 동네로 이사온 초기에는 대중교통이 정말 엉망이라 일단 서울로 나가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직행버스가 생겨서 한 번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 잘 맞춰야 함.  배차 간격이 30분 내외임. ㅠ.ㅠ)

  뭐 하남으로 곧장 가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체력이 받쳐주고 등산을 즐기는 이라면 남한산성 구경할 겸 검단산을 넘어가면 된다. (조선시대에 지은 남한산성에서 즐기는 조선시대식 하이킹...! -.-;;)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재난지원금이 나올 때마다 쓸 곳이 마땅찮다.

  위에 쓴 것처럼 생필품 구매나 병원 치료 등 돈 쓰는 일을 성남시 수정구나 서울시 송파구에서 하고 있는데, 두 지역에서는 하남시 주민이 재난지원금을 쓸 수 없으니...  갈만한 곳은 아파트 단지마다 있는 편의점 혹은 대한민국 자영업계의 대표격인 치킨점 뿐이다.  그래서 이전의 재난지원금 지급 때도 웃픈 사연이 인터넷에 올라오곤 했다.  4인 가족 앞으로 나온 재난지원금을 몽땅 치킨 배달시켜 먹는데 썼더니 식구들이 뚱뚱해졌다는 둥, 편의점에서 딱히 살 게 없어서 쓰레기 종량제 봉투만 샀더니 앞으로 10년은 종량제 봉투 살 일이 없을 것 같다는 둥...

  물론 알뜰한 사람들은 날 잡아서 차 끌고 하남 본토로 원정쇼핑(!)을 간다.  여러 번 왔다가기는 번거로우니 한 달치 먹거리를 왕창 사온다. 

 

  이 몸도 알뜰 쇼핑족을 본받아 이번 재난지원금은 하남 본토로 나가 쓰기로 했다...!

  안경을 바꿀 때가 되었는데 마침 서울과 하남 경계선 부근으로 나갈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하남 구시가지에 있는 안경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동네에서는 재난지원금을 쓸 수 있는 곳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데, 거기는 쓸 수 있는 곳 천지였다.  다 된다고 하니 오히려 적응이 안 되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 

  이왕 간 김에 분식점 들러 우동 먹고 재난지원금 쓰고, 그 옆의 롯데리아 들려서 후식으로 음료도 하나 마시며 또 재난지원금 쓰고...  패스트푸드점은 대기업 소속이라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는데, 직영점만 안 되고 개인사업자들이 하는 가맹점은 된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한 불경기 와중에도 안경점에는 재난지원금 덕분에 손님이 제법 있었다.

  먼저 온 손님 중에 엄마, 아빠, 아들이 와서 세 식구 안경을 몽땅 맞추고 가기도 했으니...  그러고 보니 작년에 첫 재난지원금이 나왔을 때도 안경점이 제일 호황이었다고 했다.  안경(플라스틱 렌즈 안경)은 원래 3~4년에 한 번 바꿔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테가 부러진다든지 하여 못 쓰게 될 때까지 쓰곤 한다.  그런데 재난지원금이 나온다고 하니 '공돈 나왔으니 안경 바꾸자' 하며 안경점으로 몰려간 것이다.  나중에는 안경 관련 업체의 주가가 올랐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였다.

 

  그나저나 하남 구시가지 여기저기에 재난지원금 사용처라는 플래카드가 붙은 것을 보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영업자들에게 재난지원금이 일단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재난지원금이란 게 결국 임시방편일 뿐인데 더는 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PS.

 

  이번 재난지원금 지급에서 제외된 하남시민들에게 희소식 하나...!

  하남시에서 자체적으로 25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남시민 전체에게 지급하다는 게 아니라, 국가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빠진 시민에 한해서다.  결국 하남 거주자는 국가에게서든 하남시에게서든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광명시도 국가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 한 사람들에게 별도로 25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앞으로 다른 지자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일 수도...?